소루담

소설 2명 · 웹툰 1명이 읽었어요

2화

도윤은 그 한 번의 눈길만 남기고 계단 위로 사라졌다. 태식이 뛰어 올라갔을 때 환승 통로는 퇴근 인파로 가득했고, 회색 코트는 어디에도 없었다. 안경 너머의 눈이 아직 목덜미에 붙어 있는 것 같았다.

주머니 속 휴대전화는 그사이 두 번 더 울다 멈췄다. 태식은 벽에 등을 붙이고 화면을 켰다. 지아의 부재중 전화가 세 통, 건우의 문자가 하나.

‘어디예요. 법원 앞에 형사 있었다던데.’

태식은 답장 대신 통화 버튼을 눌렀다. 신호음이 한 번 가기도 전에 지아가 받았다.

“지금 어디세요?”

“환승 통로. 도윤을 놓쳤어. 그 사람이 나를 봤다.”

수화기 너머로 키보드 소리가 멎었다.

“...봤다는 게 어떤 뜻이에요.”

“알아봤다는 뜻이야. 만나서 말하지. 작업실로 와. 건우한테도 연락하고.”

작업실은 법원에서 네 정거장 떨어진 상가 건물 삼 층이었다. 폐업한 학원이 내놓은 방을 태식이 석 달 치 월세로 빌렸다. 칠판은 떼어 내지 않아서 벽 한 면이 아직 분필 자국으로 희끄무레했다. 책상 둘에 모니터 세 대, 가운데에 접이식 의자. 지아는 이미 와서 노트북 두 대를 펴 놓고 있었다. 후드 소매를 반쯤 말아 올린 채 화면에서 눈도 떼지 않았다.

문이 열리고 건우가 들어왔다. 어깨가 문틀에 스칠 만큼 큰 몸이었는데, 신발을 벗어 가지런히 놓는 동작은 조용했다.

“다치신 덴 없죠.”

“없어.”

“그럼 됐고요.”

건우는 그 말만 하고 창가 쪽 의자에 앉았다. 문과 계단이 한눈에 보이는 자리였다. 태식은 그가 언제나 그 자리를 고른다는 걸 이제야 알아챘다.

태식은 계단에서 있었던 일을 짧게 말했다. 문자는 꺼내지 않았다. 말하지 않으려던 건 아니었는데, 입을 열자 순서가 바뀌었다.

지아가 키보드에서 손을 떼고 몸을 돌렸다.

“선생님, 저 한 가지만 먼저 말할게요. 오세진이나 다른 재범자들은 기록이 있으니까 제가 찾을 수 있어요. 근데 판사는 달라요. 건드리면 수사 규모가 달라져요.”

“알고 있다.”

“알면서 따라가셨어요?”

“따라갔을 뿐이야. 아무것도 안 했어.”

“그게 지금은 그런 거고요.”

지아의 목소리가 낮고 빨랐다. 틀린 말이 아니어서 태식은 대꾸하지 않았다. 칠판 구석의 분필 자국이 눈에 들어왔다. 누군가 지우다 만 영어 단어였다.

건우가 창밖을 보며 말했다.

“저는 판사가 누구든 상관없습니다. 선생님 앞에 서는 놈이면 제가 막습니다.”

“건우 씨, 그게 문제라는 거예요.”

“뭐가요.”

“막는 거랑 치는 거랑 선이 있잖아요.”

건우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오른손 주먹을 한 번 쥐었다 폈다. 마디가 하얗게 올라왔다 가라앉았다. 태식이 손을 들어 두 사람 사이를 갈랐다.

“오늘은 아무도 치지 않는다. 지아, 도윤의 공개 기록부터 뽑아 줘. 판결문, 임용 경력, 맡았던 재판. 내가 오늘 본 동선과 겹치는 게 있는지 보고 싶다.”

지아는 입술을 한 번 깨물고 돌아앉았다. 키보드 소리가 다시 시작됐다. 법원 공개 데이터베이스 창이 열리고, 그 옆에 다른 창이 하나 더 열렸다. 태식은 뒤에 서서 화면을 봤다. 숫자와 사건번호가 빠르게 흘렀다.

“한도윤,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부. 재판장으로 맡은 성폭력 사건 마흔한 건. 집행유예 비율이 평균보다 높아요. 근데 이상한 건 이거예요.”

지아가 화면 한쪽을 가리켰다.

“오세진 첫 사건 때 담당 판사가 도윤이 아니었어요. 두 번째 사건도 처음엔 다른 재판부였고요. 중간에 재배당이 됐어요.”

“누가 요청했나.”

“사유가 비공개예요. 열람 신청을 하면 흔적이 남고요.”

건우가 고개를 돌렸다.

“그럼 못 보는 겁니까.”

“못 보는 건 아닌데...”

지아가 말끝을 흐렸다. 그때 현관 쪽에서 소리가 났다. 계단을 올라오는 발소리가 아니라, 누군가 건물 입구의 유리문을 밀고 들어오는 소리였다. 건우가 먼저 일어났다. 태식은 손짓으로 그를 멈추게 했다.

휴대전화가 울렸다. 모르는 번호였다. 태식은 받지 않고 화면을 지아 쪽으로 돌렸다. 지아가 번호를 노트북에 쳐 넣었다. 몇 초 뒤 그가 고개를 저었다.

“공중전화예요. 법원 근처.”

“준호다.”

태식이 말했다. 확신보다 먼저 목이 그렇게 말했다. 그러자 지아의 화면 한쪽에서 알림이 떴다. 법원 CCTV 열람 기록이었다. 오늘 오후 두 시 사십 분, 정문 카메라 영상 열람 신청자가 이름 대신 부서 코드만 남겼다. 형사과.

“선생님 얼굴 나왔을 거예요. 계단이랑 정문 둘 다.”

“그건 어쩔 수 없다. 얼굴만으로는 이름이 안 나와.”

“수첩이 있잖아요.”

지아가 말했다. 태식은 안주머니를 눌러 봤다. 수첩은 그대로 있었다. 법원 계단에서 준호가 펼쳐 보려던 수첩이었다. 거기에는 도윤의 이름도, 오세진의 이름도 없었다. 오래 적어 온 꿈과 기도문뿐이었다.

그 말을 하려는데 지아의 얼굴이 굳었다. 화면의 열람 기록 아래에 같은 시각 다른 사람이 같은 영상을 본 흔적이 하나 더 떠 있었다. 준호의 코드와 나란히, 한 줄 더.

‘열람 사유: 한도윤 판사 신변 확인’

“신변 확인이라고요?”

“준호가 도윤을 본 거야. 나보다 먼저.”

태식은 말하고서야 문장이 이상하다는 걸 알았다. 형사가 쫓는 건 자기여야 했다. 그런데 준호는 수첩의 이름이 아니라 도윤의 기록부터 짚고 있었다. 태식의 일정과 도윤의 동선이 같은 날 같은 길에서 겹친다는 걸 이미 알고 있는 사람의 순서였다.

“오늘 안에 움직일 수 있는 건 여기까지다.”

태식이 말했다. 건우가 고개를 끄덕이고 문 쪽으로 가 섰다. 지아는 대꾸하지 않고 자판을 두드렸다. 도윤의 임용 경력, 주소지, 재배당 사유 열람 신청서가 차례로 화면에 올라왔다. 한참 뒤에야 손이 멈췄다.

“선생님.”

“말해.”

“이거 보세요.”

지아가 화면을 돌렸다. 사건 기록 창 구석에 작은 로그 하나가 떠 있었다. 태식이 한 번도 연 적 없는 파일이었다. 전송 시각은 오후 두 시 삼십일 분, 법원 정문 앞이었다. 내용은 사진 한 장과 한 줄이었다. 지하철 입구 가판대 앞에서 태식이 기둥 뒤에 서 있는 모습이었고, 그 밑에 짧게 적혀 있었다.

‘강태식, 오늘 한도윤을 뒤쫓음.’

수신처는 비어 있었다. 아직 어디에도 열리지 않은 채, 전송 완료 표시만 깜박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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