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4명 · 웹툰 1명이 읽었어요
1화
태식은 문자를 지우지 않았다. 화면을 끈 휴대전화를 주머니에 넣고, 유리문을 밀고 나오는 한도윤의 뒤통수를 눈으로 따라갔다.
“선생님.”
등 뒤에서 준호의 목소리가 한 번 더 불렀다. 태식은 돌아보지 않았다. 대신 걸음을 반 박자 늦췄다. 돌아서면 얼굴을 보일 것이고, 계속 걸으면 등을 보일 것이다. 어느 쪽이 나은지 계산이 서지 않았다. 계산이 서기 전에 발이 먼저 앞으로 나갔다.
한도윤은 회색 코트를 팔에 걸고 있었다. 법복을 벗은 판사는 생각보다 작았다. 보폭이 일정했고, 신호등 앞에서도 고개를 두리번거리지 않았다. 남에게 쫓길 거라고는 한 번도 상상해 본 적 없는 사람의 걸음이었다.
태식은 횡단보도 건너편에서 그 걸음을 쟀다. 일곱 걸음에 한 번, 도윤은 손목시계를 봤다. 수첩을 꺼내지는 못했다. 대신 머릿속에 적었다. 14시 31분, 법원 정문. 걸어서 지하철역 방면.
“징역 3년.”
혼자 낮게 중얼거렸다. 계단에 주저앉던 어머니의 어깨가 눈앞에 떠올랐다. 피고인이 변호사 어깨를 두드리던 손. 웃음. 오세진은 지금쯤 구치소 이송 버스를 기다리며 담배를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3년이면 감형 몇 번에 이 년도 안 채우고 나온다. 태식은 숫자를 아는 사람이었다. 월말 결산을 하는 사람이었다. 이 계산은 아무리 해도 맞지 않았다.
신호가 바뀌었다. 태식은 사람들 틈에 섞여 길을 건넜다. 퇴근 시간 전이라 인파가 성겼다. 양복 입은 오십대 남자 하나쯤은 아무도 쳐다보지 않았다. 이십 년 넘게 쌓은 평범함이 이럴 때 쓸모가 있었다. 마음 한쪽이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지하철역 입구에서 도윤이 가판대 앞에 섰다. 생수 한 병을 집어 천 원짜리 두 장을 내밀었다. 잔돈을 받으며 상인에게 고개를 숙였다. 태식은 기둥 뒤에서 그 모습을 봤다. 예의 바른 사람이었다. 그게 이상하게 더 화가 났다. 저 손으로 판결문에 도장을 찍고, 저 손으로 거스름돈을 받는다.
도윤이 개찰구를 지나 계단을 내려갔다. 태식은 카드를 대고 한 박자 늦게 따라 내려갔다. 승강장 바람이 먼저 얼굴에 닿았다. 쇠 냄새와 눅눅한 먼지 냄새가 났다.
도윤은 승강장 끝, 열차 맨 앞 칸 쪽에 섰다. 매일 같은 자리일 것이다. 태식은 세 칸쯤 떨어진 기둥에 기대 휴대전화를 들여다보는 시늉을 했다. 화면에는 아직 그 문자가 떠 있었다.
‘이번 사람은 건드리지 마.’
누가 보낸 걸까. 준호일 리는 없었다. 형사는 번호를 숨기지 않고 앞에서 말하는 사람이었다. 그렇다면 건우나 지아? 하지만 두 사람은 아직 오늘 일을 몰랐다. 태식은 엄지로 화면을 한 번 밀었다 놓았다. 문자 아래에는 답장 칸이 있었지만 번호가 없으니 보낼 곳도 없었다.
건드리지 말라고. 누구를.
태식은 화면을 껐다. 손끝이 아주 조금 떨렸다. 겁이 아니라고 스스로에게 말했다. 새벽마다 꿈을 적던 시절에 느끼던 것, 뭔가 자기 바깥에서 자기를 보고 있다는 감각이 목덜미에 닿았을 뿐이라고. 그건 확신이지 증거가 아니었다. 증거가 아닌 것으로는 아무도 설득할 수 없었다. 그래서 수첩이 필요했다.
열차가 들어왔다. 도윤이 먼저 올랐다. 태식은 옆 칸 문으로 탔다가, 문이 닫히기 직전 연결 통로를 지나 도윤이 있는 칸으로 넘어갔다. 자리는 반쯤 비어 있었다. 도윤은 문 옆 좌석에 앉아 코트를 무릎에 얹었다. 태식은 대각선 반대편, 손잡이 하나를 잡고 섰다.
열차가 흔들렸다. 도윤은 가방에서 얇은 서류철을 꺼내 펼쳤다. 판결문 같았다. 안경을 고쳐 쓰고 한 줄 한 줄 짚어 읽었다. 이따금 입술이 아주 조금 움직였다. 소리 내지 않고 문장을 확인하는 사람의 버릇이었다. 읽다가 한 군데에서 펜 끝으로 작게 표시를 하고 다음 장으로 넘겼다.
태식은 그 펜 끝을 오래 봤다. 오세진 사건의 서류도 저렇게 읽었을 것이다. 첫 번째 피해자의 진술서와, 두 번째 피해자가 생기기 전에 쌓였던 경고들을. 한 줄씩. 빈틈없이. 그러고도 3년이라는 숫자가 나왔다.
두 정거장이 지났다. 한 정거장에서 학생들이 우르르 탔다가 내렸다. 도윤은 고개를 들지 않았다. 세 번째 정거장 안내 방송이 나왔을 때 서류철을 덮고 생수 뚜껑을 열어 한 모금 마셨다. 목젖이 천천히 오르내렸다.
저 목은 아무것도 걸려 있지 않은 목이다, 라고 태식은 생각했다.
환승 통로에서 도윤이 걸음을 빨리했다. 퇴근 인파가 불어나기 시작했다. 태식은 사이에 사람 하나를 두고 따라갔다. 어깨 두 개 너머로 회색 코트가 보였다 사라졌다 했다. 놓칠 것 같은 순간마다 도윤은 신호등 앞에서처럼 일정하게 걸어 시야 안으로 돌아왔다.
계단을 오르다 태식의 휴대전화가 주머니에서 짧게 울렸다. 꺼내 보지 않았다. 대신 걸음이 느려졌다. 계단 중간쯤에서 문득 이상한 정적이 귀에 닿았다. 발소리와 안내 방송 사이의 얇은 틈 같은 것. 누군가 숨을 멈추고 이쪽을 보고 있는 느낌.
태식은 고개를 들었다.
계단 위에서 도윤이 멈춰 서 있었다. 코트를 팔에 걸친 채, 인파가 양옆으로 갈라져 흐르는 한가운데에서 혼자 돌아서서. 안경 너머 눈이 곧장 태식을 향했다. 우연히 둘러본 눈빛이 아니었다. 처음부터 거기 있는 사람을 찾아낸 눈이었다.
태식은 움직일 수 없었다. 도윤의 입꼬리가 아주 조금 움직였다. 웃음인지 아닌지 알 수 없었다.
주머니 속에서 휴대전화가 다시 울렸다. 이번에는 길게, 떨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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