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루담

자정의 간이역 · 서해강 · 목차

소설 1명이 읽었어요

1화

서필은 그 종이를 끝내 받지 못했다. 손이 올라가다가 중간에서 멈췄다. 삼십 년을 기다렸으면서도, 막상 내밀어진 것 앞에서는 손가락이 말을 듣지 않았다.

"형님, 그건…… 제가 먼저 드려야 할 말입니다."

"먼저고 나중이고 따질 게 뭐 있냐."

서만은 종이를 도로 접어 주머니에 넣었다. 작업모 아래로 보이는 턱이 사십 년 전보다 덜 단단해 보였다. 부두에서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 형은 서필보다 머리 하나가 컸는데, 지금은 눈높이가 거의 같았다.

"빚은 내가 갚았다. 다 끝난 일이야. 네가 그걸 알아야 해서 온 거다."

"갚다니요. 어떻게……"

"나중에 얘기하자. 오늘 밤은 길다."

서만은 그 말만 하고 서필의 어깨를 한 번 쥐었다. 손은 차가웠지만 무게는 분명했다. 서필은 그 무게가 어깨에서 빠지지 않기를 바라며 가만히 서 있었다.

승강장에는 다른 승객들이 흩어져 서 있었다. 누구는 벤치에 앉았고, 누구는 끊어진 레일 쪽을 한참 바라보았다. 서필은 그 사람들 얼굴을 하나하나 알아보았다. 교대하던 기관사, 매점 할머니, 같은 해에 입사한 동기. 그들도 저마다 손에 쥔 것이 있었다. 하지만 서필의 눈은 자꾸 맨 끝, 마지막 칸으로 돌아갔다.

문이 열려 있었다. 안은 누런 불빛으로 채워져 있었고, 그 한가운데로 누군가 천천히 걸어 나오고 있었다.

굽이 낮은 신발이 승강장 콘크리트를 밟았다. 소리는 나지 않았다. 흰 머리핀이 불빛을 받아 잠깐 반짝였다.

"서필 씨."

램프가 손에서 기울었다. 서만이 말없이 그것을 받아 들었다.

"연순이."

이름을 부르는 데 한참이 걸렸다. 삼십 년 동안 혼자 입에 올려 본 이름인데도 소리가 되어 나오지 않고 목에서 부서졌다. 연순은 그런 그를 보고 웃었다. 입가에 잡히는 주름까지 기억 그대로였다.

"제복은 여전히 단정하시네요. 단추만 빼고요."

그녀가 다가와 서필의 가슴께로 손을 올렸다. 그리고 두 개의 다른 단추 중 아무거나 붙였던 쪽을 엄지로 쓸어 보았다. 마치 거기 있을 줄 알았다는 듯, 더듬는 기색도 없이.

"이건 제가 안 단 거네요. 실이 너무 굵어요. 서필 씨는 바느질을 못 하시니까."

"그랬습니다. 달아 줄 사람이……"

말이 끊겼다. 연순의 손이 단추 위에서 조금 오래 머물렀다. 서필은 그 손이 닿은 자리가 따뜻한 것인지 시린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왜 이렇게 늦게 오셨어요. 저는 오늘 올 줄 알았는데."

"오늘이요?"

"오늘 같은 날이요. 램프 심지를 돋우고 계실 줄 알았어요."

서필은 대답하지 못했다. 열차가 설 때마다 이 승강장에 서서 수많은 이름을 받아 왔지만, 그녀의 이름만은 한 번도 불려 나오지 않았다. 오지 않을 줄 알았던 것이 아니었다. 오면 그다음이 있다는 걸 알았기 때문에, 오지 않기를 바랐던 것이다.

서만이 뒤에서 헛기침을 했다.

"나는 저쪽에 가 있으마. 둘이 얘기해라."

"형님."

"급할 거 없다. 첫닭 울려면 아직 멀었어."

서만은 램프를 개찰구 옆 못에 걸어 놓고 승강장 저편으로 걸어갔다. 걸어가며 한 번 뒤를 돌아보았는데, 그 얼굴이 어쩐지 웃는 것도 같고 미안해하는 것도 같았다. 서필은 그 표정이 마음에 걸렸으나 붙잡아 물을 정신이 없었다.

바다 쪽에서 파도 소리가 낮게 깔려 왔다. 벽시계는 오늘도 자정 십 분 전에 서 있었다. 열차가 닿은 지 한참인데도 바늘은 움직일 생각이 없어 보였다.

연순이 품에서 하얀 봉투를 꺼냈다. 모서리가 닳아 부드러워진 봉투였다. 오래 품고 다닌 물건의 손때가 묻어 있었다.

"받아 주세요. 못 드린 말이 많아서 썼어요. 말로 하면 또 농담으로 돌릴 것 같아서요."

"농담이면 어떻습니까."

"서필 씨가 웃으시잖아요. 그러면 정작 하려던 말을 못 해요."

그녀는 봉투를 두 손으로 받쳐 내밀었다. 서필은 손을 뻗었다가 거두고, 다시 뻗었다. 이걸 받으면 시작이었다. 받고, 읽고, 또 받고,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 더 받을 것이 남지 않는 때가 온다. 그때 열차는 문을 열어 놓고 기다릴 것이다. 그는 그걸 알면서 삼십 년을 살았다.

"연순이. 나는 아직……"

"알아요."

그녀는 짧게 답했다. 길게 설명하지 않는 말투가 그가 기억하는 그대로였다.

"그래서 천천히 읽으세요. 첫닭이 울기 전까지만 읽으시면 돼요."

서필은 마침내 봉투를 받았다. 종이는 가벼웠다. 가벼워서 오히려 손목이 아팠다. 앞면에는 눈에 익은 둥근 글씨로 한 줄이 적혀 있었다.

'당신이 읽을 수 있을 때 열어요.'

그는 그 글자를 오래 내려다보았다. 읽을 수 있을 때. 읽을 수 없는 때가 있다는 뜻인지, 아직 그때가 아니라는 뜻인지 알 수 없었다. 고개를 들자 연순은 이미 한 걸음 물러나 있었고, 그 뒤로 열차의 불빛이 그녀의 어깨선을 따라 흔들리고 있었다.

봉투 뒷면에는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았다. 다만 봉한 자리의 풀이 아직 마르지 않은 것처럼 손끝에 끈적하게 달라붙었다.

AI와 함께 쓴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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